1. 인디언과 최초의 유럽인
현재 북미 대륙은 유럽 국가들이 식민지로 삼기 전 오랜 기간 동안 인디언들의 땅이었습니다. 원주민들의 아메리카 이주에 대한 학설로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몽골계 인종들은 수만 년 전 빙하기에 수위가 낮아져 다리처럼 연결되었던 베링 육교를 건너 알래스카로 이동한 뒤 아메리카 전역에 퍼져 살게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둘째, 남태평양의 아시아계 종족들이 바다를 건너 남아메리카에 도착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이러한 학설들은 아직 정확한 경로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북아메리카 초기의 인류가 살았던 흔적은 계속 발견되고 있습니다. 최근 알래스카 북부에서 발견된 수렵군 망보는 곳의 흔적과 뉴멕시코의 클로비스 근처에서 발견된 창촉은 수천 년 전의 것입니다. 그러나 기원전 1만 2000년 이전의 믿을 만한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15세기 경, 북미에는 약 400만 명의 인디언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중 캐나다와 미국의 동북 문화권에 약 250만 명, 알래스카에서 캘리포니아 남부에 이르는 로키 산맥 서쪽에 약 150만 명이 거주했습니다. 1960년 인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국에는 약 42만 명의 인디언이 생존해 있었습니다. 백인들에게 토지를 빼앗기고 문화의 독립성을 상실해 가는 것이 인디언의 역사입니다. 현재 인디언들은 수십만 명 정도가 보호구역에 거주하면서 미국 정부의 보조금으로 연명하고 있습니다. 백인들은 좁은 유럽 땅에서 소유권 개념이 강하게 발달한 반면, 인디언들은 넓은 북미 대륙에서 소유권 개념 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백인과 인디언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고, 백인들은 인디언들의 땅을 빼앗았습니다. 인디언들은 싸움에서 지고 질병을 피해서 서쪽으로 도망가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조약에 의해 땅을 빼앗겼습니다. 지금부터 천 년 전, 노르만인들이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를 거쳐 북미 대륙의 북쪽 해안에 도착했습니다. 리프 에릭슨(Lief Eriksson)은 약 1년간 거주하였고, 1012년경 도르핀 칼스피니와 소수의 노르만인들도 캐나다의 세인트로렌스 강 유역에 약 1년간 정착하였으나, 추위와 배고픔, 농사의 실패로 이곳을 떠났습니다.
2. 식민지 시대 (1493년 ~ 1776년)
이탈리아인 항해사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대서양 서쪽으로 계속 항해하면 인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오랜 노력 끝에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으로부터 항해에 대한 후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콜럼버스는 1492년 여름, 스페인을 떠나 대서양을 서쪽으로 3개월 이상 항해한 끝에 산살바도르(San Salvador)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이를 인도라고 믿었지만, 사실 그것은 신대륙이었습니다. 콜럼버스 이후, 영국인 존 캐벗(John Cabot)은 북미 대륙의 동해안을 탐사했고, 영국왕은 이곳을 식민지화했습니다. 프랑스인 자크 카르티에(Jacques Cartier)는 세인트로렌스 강을 거슬러 현재의 캐나다 땅을 차지했습니다. 유럽인들의 남북 아메리카 탐험과 개척은 인디언에 대한 영토 약탈과 학살을 동반했습니다. 1607년 8월, 영국 성공회 교인들은 현재의 버지니아주 제임스타운에 정착했습니다. 1620년, 필그림(pilgrims)으로 불리는 청교도인들은 플리머스에 도착하여 뉴잉글랜드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청교도 중 분리주의자들로서 영국 국교를 부정하고 완전히 분리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1620년 9월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오다가 ‘메이플라워 서약(mayflower compact)’을 하였습니다. 이는 법이 모든 사람에게 구속력을 가지기 위해 다수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내용으로, 미국 최초의 자치 헌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청교도인들의 생존과 교육
청교도인들은 1621년 가을,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생존에 성공했습니다. 이들은 남쪽 성공회 교인들의 거주지인 제임스타운과 다른 행정 체제를 시행했습니다. 식민지 행정은 매년 선출하는 지사와 자문위원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청교도인들은 신정정치를 시행하고, ‘종교’ 다음으로 ‘교육’에 관심을 가져 1635년에 하버드대학을 설립했습니다. 처음에는 인디언들과 우호적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청교도들은 인디언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 했고, 인디언을 노예화하여 강제 노동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들을 멀리한 새로운 개신교도들과 유럽인들이 펜실베이니아와 뉴욕 등을 건설하여 식민지가 확장되었습니다.
3. 미국 혁명
18세기, 동북부는 한랭한 기후로 농업에 적합하지 않아 양조, 조선, 섬유 등의 산업이 발달하며 영국 본국의 경제를 압박하게 되었습니다. 개신교도가 다수파를 차지하는 식민지와 영국 성공회를 국교로 하는 본국 사이에는 알력이 있었습니다. 영국 본국은 프랑스와의 오랜 전쟁으로 인해 자국군의 주둔비와 전비를 충당하기 위해 식민지 주민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인지세법’을 제정했습니다. 식민지인들은 과세 반대와 ‘인지세법’ 폐지를 주장하며 반대 운동을 전개했고, 결국 영국은 세금을 철폐했지만 ‘차법’으로 차의 무역을 독점하려 했습니다. 이에 식민지인들은 1773년 ‘보스턴 차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보스턴 차 사건에 충격을 받은 영국은 보스턴 항구를 폐쇄하고 주민들에게 강경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아메리카 13개 식민지 대표들은 필라델피아에서 대륙 회의를 열고, 식민지의 자치권을 요구하며 영국에 저항할 것을 결의했습니다. 1775년 4월, 렉싱턴과 콩코드에서 영국군과 민병대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며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식민지 대표들은 제2차 대륙 회의를 개최하여 조지 워싱턴을 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대륙군을 결성했습니다. 1776년 7월 4일, 대륙 회의에서 토마스 제퍼슨이 초안한 미국 독립 선언서를 발표했습니다. 미국 독립군은 전쟁 초기에 영국군에게 패배를 당했으나, 1778년 프랑스와 동맹을 맺어 군사적 지원을 받으며 에스파냐와 네덜란드와도 동맹을 맺었습니다. 이후 워싱턴의 지구전 전략과 프랑스 해군의 지원으로 전세는 독립군에게 유리해졌습니다. 1781년, 영국은 요크타운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고, 1783년 9월 3일 프랑스 파리에서 ‘파리 조약’을 맺어 영국은 미국의 독립을 승인했습니다. 독립 후 13개 주는 연방 헌법을 만들어 미국적인 민주주의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이 헌법 제정으로 미국은 3권 분립된 대통령 중심제와 연방주의에 기초한 지방자치제도를 실현했습니다.
결론
미국의 역사는 인디언들의 땅을 유럽 국가들이 식민지로 삼기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초기 유럽인들의 탐험과 정착, 그리고 식민지 시대를 거쳐 미국 독립 전쟁에 이르기까지 미국사는 다양한 갈등과 변화를 겪었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통해 미국은 민주주의와 자치의 기초를 세웠으며, 오늘날까지 그 가치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 글은 미국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며, SEO에 맞춰 전문가의 시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미국 역사의 다양한 측면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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